노인의 자세

여류작가 의 노년관(老年觀)

몽은 2013. 7. 16. 08:36
여류작가 의 노년관(老年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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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작가 박경리와 박완서의 노년관(老年觀)




소설가 박경리씨는 운명하기 몇 달 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다음은 노년의 박완서씨가 썼던 글입니다.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서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하고 싶다고 말 할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좋은데 젊음과 바꾸겠는가 . . .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난 살아오면서 볼 꼴, 못 볼 꼴 충분히 봤다.
한 번 본 거 두 번 보고 싶지 않다.
한 겹 두 겹 어떤 책임을 벗고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소설도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져도 그만이다."
두 분은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여류 소설가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조용한 시골집에서
행복하게 삶을 마감했던 분들입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지요.
가장 아름다운 인생(上善)은 물처럼
사는 것(若水)이라는 뜻입니다.
물처럼 살다가 물처럼 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이처럼 인간의 삶을 진지하게 표현하는 말도 없을 듯 싶습니다.
위의 두 분은 물처럼 살다 간 대표적인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흐르는 물처럼
남과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는
부쟁(不爭)의 삶을 보여주었고,
만물을 길러주고 키워주지만
자신의 공을 남에게 과시하려 하거나
결코 다투려 하지 않는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초연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두 분의 삶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자유로움이었습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배우고
만나는 모든 것들과 소통하며
끊임없이 장강(長江)의 글을 쓰면서
그 글 속에서 인생과 사랑을 말했습니다.
말년의 두 분은 노년의 아름다움을
온 몸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후배들에게 이렇게 나이 먹어야 한다고
아무 말 없이 조용한 몸짓으로 표현했습니다.
박경리씨는 원주의 산골에서
박완서씨는 구리의 어느 시골 동네에서
흙을 파고
나무를 가꾸면서
빛나는 노년의 침묵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노년의 행복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말했습니다.
천천히 걸어도 빨리 달려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직 한 세상 뿐입니다.
더러는 조금 짧게 살다가,
더러는 조금 길게 살다가
우리는 가야 할 곳으로 떠나갑니다.
두 분의 삶을 바라보면
이 소중한 시간을
이해하면서 살라고,
배려하면서 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둘도 없는 삶을
지난 날을 돌이키며 후회하기 보다는
남은 날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희망과 행복을 찾아 보자고
다독여 주는 것 같습니다.
두 분의 삶에서 배웁니다.
보이지 않는 바람에게조차
고마움을 느끼는 일상,
조그만 일에 끊임없이 감사함을 느끼는 노년,
그렇게 넉넉한 마음의 행복을 배우게 됩니다.
인간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는 결혼
‘인간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는 결혼이다’ 이 말은 어느 철학자가 해학조로 한 말이다. 이어서 ‘결혼은 판단력의 부족으로 하는 것이고, 이혼은 또 이해력의 부족 때문에 하는 것이고, 재혼은 기억력이 없어서 하게 된다 ‘고 했다.그냥 웃자고 해본 말이겠지만, 마음 깊숙이 숨겨둔 인간의 약점이 탄로 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사회학자의 말에 의하면 ‘인간이 결혼을 하면 배우자 때문에 자유가 구속되는데, 그러나 혼자 살면 고독하고 불편해서 문제라’ 고 했다. 그래서 키에르 케고르 도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하는 것이라고 말 한바 있다. 또 어떤 이는 결혼을 ‘연애의 무덤’이라 했는데 이 말은 결혼을 하면, 낭만과 연심(그리워 하는마음)이 매장 되고 만다는 뜻일 것이다.

또한 어떤 철학자는 ‘전쟁터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하고, 결혼할 때는 세 번 기도하라’고 했는데, 결혼의 노정엔 전쟁터나 험한 바다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으니 각오와 준비를 철저히 하고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결혼하기 전엔 상대방을 정확히 보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봐야 되지만, 결혼을 한 다음엔 한 눈을 감고 (실수를 눈감아 주기 위해) 살아야 된다는 말도 있다.

결혼은 결국 속는 줄 알면서도 속아 주는 행위이다. 그래서 생각이 신중한 사람들 중엔 결혼이 늦어지거나, 결혼을 못하고 마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결혼을 하는 사람이 다 어리석은 사람이고, 생각이 모자란 사람이란 뜻은 아니다. 세상은 논리대로만 살 수도 없고, 계산대로만 살 수도 없고, 이익만 ㅉㅗㅈ아 살 수도 없다는 뜻이다. 시련이야 있겠지만 그래도 자식을 위해서 살아야 되고, 하늘의 뜻 때문에도 살아야 되고, 도덕의 규범 때문에도 살아야 된다. 불만이 좀 있더라도 ‘원래 결혼이란 그런 것이려니….’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된다.
만일 사람들이 모두 결혼을 안하고 독신으로 살면,사회라는 공동체는 금방 무너지고, 도덕도 무너지고, 역사도 멈추게 되니 그것은 하늘의 뜻에도 크게 반하는 행위가 된다.그리고 이혼은 이해력 부족으로 한다는 말도 일리가 있다.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말은 인정해준다는 말이고, 용서해주고, 상대방의 장점을 평가해주고, 참아주고, 사랑해준다는 말이다. 그런 이해심이 있으면 이혼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또 재혼은 기억력 부족으로 한다는 말도 일응 맞는 말이다. 결혼생활의 가시에 찔려도 보고, 결혼생활의 부담을 체험도 해봤으면 재혼은 절대로 안할 것 같은데, 또 결혼을 하는 것을 보면 기억력이 부족하다는 말에 일리가 있다.
사실 재혼은 하는 것보다는 안할 수 있으면 안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재혼은 초혼보다 서로간의 나이와 자녀등 조건은 불리하고, 정신적 경제적부담은 더 많다. 그러니 서로가 자기 자존심을 조정할 수 있어야 되고, 돈이나 이해(利害)같은 것은 계산하지도 말고 바보처럼 살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된다. 감정과 쓸개도 빼 놓고,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살겠다는 각오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처럼 인간은 결혼이 최대의 실수라는 경고를 들으면서도 결혼도 하고 재혼도 하는데 그런 실수를 통해 행복도 얻고, 대업도 이룬다. 그러고 보면 결혼은 ‘위대한 실수’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