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정주영] 다큐멘터리 - 우리 시대의 진정한 거인>




요기 크릭 ▶ http://cafe.daum.net/enka6300/M8bM/491




대한민국 국민이여! 전 세계로 메-일 보냄시다


- 전세계 배포용 -

우리의 선열들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군가를 부르면서

일본군의 잔학하고 악랄하고 무자비한 총칼에 순직 하였습니다

일본은 1880년경 부터 우리나라에 불법으로 일본군을 주둔시켜
각가지 만행을 자행한 후 결국은 나라를
송두리째 빼았아

 점령하더니 그래도 모자라서 다시 독도를 자기들의

 영토라고 점령 할려고 합니다.

강점 36년 동안에 자행한 일본의 만행을 들추어 전 세계에 고발을 합시다.

강점 36년 동안에 자행한 일본의 만행을 들추어 전 세계에 고발을 합시다.


끔찍한 사진이 많으니 심장이 약한분은 주의가 필요
  


광복 독립군과 독립투사, 양민들이 잔학한 일본군에

붙잡혀 온 집결장이다.

일본인에 체포 되어 어디론가 이동하기위해 대기 하고 있다.

손을 뒤로 묶인채 소리 없이 침묵하고 있다.1928년 이때부터 일본군은 악랄하고

잔혹한 살육의 강도를 높인다.






독립투사 또는 양민을 학살 하기 위하여 일본도를 손질하는 일본군인 놈들



독립군, 독립투사를 처형장소로 가기 위해 트럭에 싣고 있다



일본군놈의 장칼에 목이 떨어지는 독립군-죽일 놈들





일본군 놈들에 끌려 가는 독립군 의병장


무기도 빈약하고 의복도 남루 했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군놈들을 해 치워야 겠다는 의기 투철한 의병대들 모습




총검으로 처형하기 위해 담장 쪽으로 몰고가고 있다이미 총검에는 선혈이 묻어 있다


체포된 독립군은 결국 처형을 당했다.
칼로 목을 칠 때 넘어 가지 않도록 팔을묶고 뒤에서 당기고 있다.
일본인 칼에 목이 떨어지는 순간을 촬영한 것이다.


개를 풀어 인간 사냥을 하는 모습이다 결국 총살로 생을 마친다



독립군 간부의 처형 장면이다. 목을 치기전 일본군이
웃는 모습을 볼 때 분노보다 일본의 양심과 목적을 혼돈하게 한다.



죽은시신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화장을 시켰다
온 마을이 유해로 가득하고 일본의 원폭 피해처럼 보인다.


손을 뒤로 묶고 물에 수장하는 처형
처형이라기 보다 학살이라고 하는게 맞을것 같다.




일본 토벌군인 들은 사정없이 민간인 까지 처형 했다
떨어진 목을 손에 쥐고 미소까지 보이는 것은 사람 목숨을
장난삼아 학살하는 것을 증명 할수 있는 장면이다.





일본놈 들은 포로가 된 민간인 과 독립군을 사정없이 목을 잘라서
담장 밑에 상품처럼 진열하여 두고 있다
독립군 용사들은 죽어서도 한결같이 한을 품고 눈을 감고 있다.






생매장 되어지고 있는 양민들. 일본놈들의 잔혹함을 엿볼수 있다
이렇게 돌아가신 분들은 숨이 끊어질때 까지 대한독립을 원했다.






일본군 의사 간부가 세균 생체 실험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마취도 없이 손을 묶고 해부하고 있다, 복부에 창자와 내용물이 나오고
일본인들은 입 마스크하여 지켜 보고 있다.






일본군들이 처형하기전 목에 수건을 감아놓은 것은
칼이 목을 치기전 잘린 몸통에서
품어 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수건을 얹어 놓은 것입니다.






손을 뒤로 묶고 칼로 살육하는 장면



  

지독한 고문
하의가 벗겨지고 혹독한 고문뒤 결국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은 나무 벌목 과 혹독한 노역을
시키고 난뒤 결국 모두 처형되었다.






총검으로 처형당하는 모습이다.





총검으로 심장을 찌르는 장면. 천벌을 받을 놈들이다





일본도로 목을 자를려고 고개를 새우고 있다





잔학의 극치를 보여주는 장면. 처형하는 순간



칼이 지나가 목이잘린상태



독립군의 목은 이미 칼이 지나가 목이 잘린 순간





처형후 두병사의 자랑스런 자세로 기념찰영






죽음을 기다리는 양민들 일본인 감시아래 손이 뒤로 묶여져 있다.





생매장된 양민들 가족들에 의해 파헤쳐지고 있는 장면이다 죽은사람의

표정에서 일본인의 잔혹한 흔적을 엿볼수 있다.






처형을 기다리는 소년투사.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다.





잔악 무도한 일본군들이 대량 학살 하고난 뒤
처참한 광경

교랑에즐비한 시체들 중에 뒤에 흰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과 애국지사의

가족들이 시신을 찾기 위해 살펴 보고 있다.






잔혹한 살육 장면(1942) 옷이 벗겨진 여인은 온몸이 상처 투성이다
목은 짤라져 있고 얼굴 모습은 등뒤로 돌려 져있다.






강간후 총으로 치부에 발포한 장면.엉덩이에 총상
구멍이 선명하게 보인다 여성의 음부를 일본군이 가려좔영 하였다

더 이상 해설이 필요 없는 사진이다.






한국 여인들을 찾으러 다니는 일본군들
눈에 띄는 여성은 모두
끌고가 강간후 살해했다 이런 여성보급을  당담하는 일본군은 항상
여러명의 한국여성을 데리고 다녔다.






수장된 시신들 손을 뒤로 묶고 저수지에 수장시켰다

살기 위해 허덕이는 사람 에게는 긴막대기로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곳으로 몰아 넣어 집단으로 무차별 학살 한 후 불 태웠다.





(1937년)허탈한 아버지 죽은 어린 자식 시신을 물건
처럼 들고 있을 만큼 어이가 없는 학살 이였다.






여성의 옷을 벗기고 마구 살육당 했던 참혹한
현장

모래 사장에 뒹굴고 있는 시신들 일본군이 1943년 후퇴 하면서 최후 발악을

자행한 흔적들이다.





(1938년)죽이는 방법 시범 실습 현장 장면이다

강변에서 총검으로 살육하는 실습을 자행하고 있다 이런 현장을 지켜보기 위해

동원된 일본군인들은 관심 깊게 보고 있다.






살이 떨리는 공포.두사람의 양민이 포로가 되어 일본인에게 두손 모아

 애원하는 모습이 보이고 일본군은 무엇인가 소리 치고 있다.






산더미 같은 시체. 여성의 하의가 벗겨져 있고 하체에선 선혈이 흘러 나오고 있다.






집단 학살 가슴에는 죄명아닌 죄명을 달아놓고
사살했다
얼굴의 선혈을 보아 총살이다.





이성 잃은 일본군 일본군은 여성의 음부를
손가락으로 장난하고 있다
전쟁과 관계 없는 일이다 일본의 숨은
근성을 엿볼 수가 있다.





부녀자 강간. 일본 병사의 손을잡고 애원하는 모습입니다
이미 젖가슴이 드러나고 반항을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수난이다.





수장된 시신. 손을 뒤로 묶고 못에 수장을 시켰다
막대기는 위에서 누르고 있다 살기 위해 얼마나 바둥 거렸는지 짐작이 간다.






갓난 아기의 죽음. 인형처럼 뒹굴고 있는 아이들의 시체
일본 놈들은 전쟁으로 이성을 상실 했었다.





너무나도 억울한 죽음. 잡아온 양민들을

 표적 삼아 사격 연습을 하고 있다.



 

부녀자 집단사살. 엄마와 함께 도피 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흐르는 선혈이 계단을 적시고 있다.





집단 사살 현장. 오른쪽 일본군이 죽은

시체를 확인하고 있다.





부녀자 절규. 하체를 강압에 의해.

(차마 설명 할수 없음)

손에 실반지가 보인다 단란했던 가정을 등지고

 결국 정신대로 갈것이다 여성이 입을 벌리

 있는 것은 한숨 뿐이다.






작두로 처형 직전. 작두로 목이 곧 짤러 질것이다.





작두로 목을 짜르고 있다 작두 앞에 잘려진
목이 하나 보인다.





작두로 수없이 잘려간 양민들의 모습
일본군이 장난 삼아

목이 잘린 시체의 손을 자신의 잘린 목부분을 가르키게 해놨다.

저런 끔직한 일은 일본군에겐 단지 장난에 불과했다.



 

일본 관동대학살 (1923년) 1923년 일본 관동일원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10여만명이 사망 했다

민심이 극에 달하자 일본 정부는 한국인 폭동설을 조작 유포시켜
한국교포 약 5천명을 피살 하였다.

(몽둥이, 죽창 으로 학살)



 

창고에서 독살. 엄청난 시체가 당시 혹독한 진실을 보여 주고 있다.



  

노역자가 운송을 마치면 죽음 이다.
부릴때로 부리 쓸모가 없어지면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이렇게
  죽였다.


3명의 의병 총살 현장.영국여행가 비숍 씨가
촬영한 것이다.

영국왕립 박물관에 소장된 자료.서대문 형무소뒤야산 공동묘지에서

독립 의병 3사람이 총살 당하는 모습이다.

 
일본군들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하기로 한것인다.

어린아이들 까지 죽여 불태워 졌다.
온갖 수단으로 자행한 행위는 사진속에는
피할수가 없다.


독립 투쟁을 벌이다가 집단학살된 유해들. 잔혹한 행위로 소리없이

죽은 영혼은 무엇으로 위로할 것인가?


선량한 양민을 단 칼에 처형하는 지구상에는 하나 밖에 없는 족속들이다





<죽음 앞에서도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당당한 독립투사>

 

목을 베어 놓고 참아 볼수 없는 사진이다.


길거리에서 일본 군인 놈에게 강간을 당하고 맞어서 내장이 나온 상태

 

일본군 종궁 위안부(정신대)의 거실 내부- 이곳에서
일본군은 성욕을 채웠다.




  

근심이 가득한 한국여성. 일본군 위문품을 강제로 하는수 없이 만들고 있다
이곳에서 강제 노동을 하면서 일본군의 노리게로 끌려 갔다.



  

종군 위안부에 들어 가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일본 병사들



종군 위안부의 음부를 노출하게 하여 찍은 사진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막사로 실려가는 위안부



위안부의 휴식시간


일본병사 근무지에도 불려간 종군 위안부

누구나 이 메일을 자기 블로그, 카페에 올리고
이 사진을 메일로 의무적으로
 다른 여러분에게 발송해서
일본의 잔인함을 전세계가 알게합시다.

꼭 꼭 전 세계가 알게합시다 

 너무 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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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25. 한국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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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정일의 유서 전문 *********|◈ ▶ 眞 實 과 거짓 ★

관천 | | 조회 21 |추천 0 | 2018.04.06. 23:00 http://cafe.daum.net/nowool05/JZ2e/2818 

 

우리의 주적, 북한을 바로 알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했습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김정은의 극비 방중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북한에, 예측불허의 이상기후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북한에 대한 초극비사항이

한 북한문제 전문가에 의해서 전격 공개되었습니다...!!!
***************************

김정일 유서 전문

-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제공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이하 NKSIS)21일 서울 프린스호텔에서

<김정일의 유서와 김정은의 미래>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이윤걸 NKSIS 대표의

저서 <김정일의 유서와 김정은의 미래>엔 입수한 유서 전문과 함께

이에 대한 심층 분석을 담았다.
이 대표는 편의상 5개 부분 44개 항문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확실하게 단어 하나하나, 순서 하나하나 절대로 바꾸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유서의 신뢰도에 대해서는 이 책의 제3NKSIS가 유서를 입수하게 된

배경이나 하단 관련기사를 참고하면 된다.

* 김정은 3대 세습 권력 핵심세력
1-01 유언집행은 김경희가 한다.
1-02 가장 특별한 리유가 없는 한 김정은을 후계자로 한다.
1-03 유서내용을 읽는 순간부터 1년 내에 김정은을 최고직책에 올려 세운다.

그로 인한 부정적인 견해와 립장, 현상들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처리하도록 할 것.
1-04 김정은을 당적으로는 김경희와 장성택, 최룡해, 김경옥이, 군적으로는

김정각과 리영호, 김격식, 김명국, 현철해가, 경제적으로는 최영림과 김창룡, 서원철, 김영호가

책임적으로 보좌할 것.
1-05 모든 자식들과 식구들을 김경희와 김정은이 끝까지 돌보도록 한다.
1-06 김정남을 많이 배려해야 한다. 그 애는 나쁜 애가 아니다.

그의 애로를 덜어주도록 할 것.
1-07 김설송을 정은의 방조자로 준비시키고 밀어줄 것.
1-08 국내의 삼천리금고와 216호 자금을 김정은에게 이관시킬 것.
1-09 해외은행들에 저금되어있는 자금을 김정,

리철호 서기와 합의하여 정은에게 이관시킬 것.
1-10 국내와 외국의 모든 자금관리를 김경희가 할 것. 김경희가 다 할 수 없을 경우

(사망이나 육체적 능력이 안 될 경우) 김설송이 맡아서 할 것.
1-11 금고안의 모든 개인서류들을 정은에게 넘길 것.


* 대내 통치 핵심 전략
2-12 종파를 주의할 것. 우리당 력사에서 종파는 항상 있어왔으며

그놈들은 언제나 국가가 어려울 때 머리를 쳐들어 당의 분렬을 꾀하곤 하였다.

지금의 종파는 이전과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2-13 이전에 끼리끼리 무리를 지어 당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면 지금은 교활한 방법으로

뒤에서 동상이몽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

자본주의식 개혁개방을 반대하는 것처럼 하면서 자기네들끼리는 그 필요성과 정당성을 론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2-14 김경희와 정은이는 이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한다.
2-15 보위총국과 국가안전보위부를 정수분자들로 꾸리고 그들의 지위를 높여줌으로써
그들이 자기들의

임무와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보위총국에 대한 관심을 백방으로 높여야 한다.
2-16 선군사상을 끝까지 고수할 것. 국방에 소홀히 하면
어느 때든지 대국의 노예가 된다.
2-17 , 장거리미싸일, 생화학무기를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충분히 보유하는 것이 조선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길임을 명심하고 조금도 방심하지 말 것.
2-18 원유시추문제를 반드시 해결할 것. 이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남북이 힘을 합치는 것이다.

중국이나 유럽, 러시아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2-19 전기 문제 해결에서 원자력발전소건설이 첫째가는 것임을 명심하고 적어도 3개의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도록 할 것.
2-20 남흥, 2.8, 흥남의 세 곳에 있는 비료공장만 정상화하여도 농사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명심하고

비료문제해결에 총력을 집중할 것. 생물, 미생물비료 리용도 중요하지만 제한적이다.

우리는 화학비료 생산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2-21 희천발전소건설을 무조건 단 기간 내에 완성하여야 한다.

자강도와 량강도지역에서의 전략적 목적들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선결조건이다.


* 한반도 통일 핵심전략
3-22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 조국을 통일하는 문제는 우리 가문의 종국적 목표이다.

정은이 대에 안 되면 그 후대에 가서라도 무조건 통일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3-23 현 남조선정권하에서는 북남관계개선이나 통일이 불가능하다. 남조선의 다음 정권과의 관계에서

사상적으로 철저한 우위를 차지하며 그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한 상태에서 경제, 문화교류를

시작으로 통일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3-24 전쟁을 통한 통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전쟁을 하는 경우 우리는 남보다 몇 백 년 떨어지게 된다.

우리가 이겨도 결국은 후대들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주는 것이 없음을 명심하고 수령님의 유훈대로

어떻게 하나 평화적으로 통일해야 한다.
3-25 남조선과의 관계가 개선되는 선제조건하에 철도, 도로, 뱃길을 연결하고 기간공업을 추켜세우며

농사문제와 경공업문제, 관광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3-26 우리는 지금이 안 되면 후에라도 남조선과 손을 잡고 함께 발전해야 한다.

이 길만이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이다.
3-27 우리에게 있어서 남조선의 경제발전은 하나의 큰 기회이다.

내가 늘 말하는 지식경제기반의 강성대국건설에서 자력갱생도 중요하지만 민족단합을 통한

강성대국건설이 더 의의가 있고 빠른 길이다. 북과 남이 어떻게 하나 힘을 합쳐야 한다.
3-28 조선반도의 안정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군사적 위력이 결정적임을 남조선당국자들에게 인식시키고

그들과 힘을 모아 경제발전을 해나가는 것이 내가 늘 추구해왔던 전략이였다.
3-29 그것이 나의 대에 안 되면 다음 대에 이어서라도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

* 대외관계 핵심전략
4-30 미국과 중국, 러시아, 일본의 4개 대국과의 사업을 잘 해야 한다.

남과 힘을 합치고 우리 주변의 대국들을 잘 리용하면 우리나라가 대국이 되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4-31 우리와 남이 힘을 합치는 것을 좋아하는 나라는 이 대국들 중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반대할 나라도 없다.
4-32 북과 남이 하나가 되는 문제에 있어서 이 대국들이 중립적인 립장을 가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4-33 그러자면 미국을 남조선에서 철수시켜야 하며 중국의 정치, 경제적 간섭을 이겨내야 한다.
4-34 일본과의 정치적 문제해결에서 과거청산과 랍치자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전략을 세우고

집행해나가야 한다.
4-35 미국과의 심리적 대결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합법적인 핵보유국으로 당당히 올라섬으로써

조선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켜야 하며 국제제재를 풀어 경제발전을 위한 대외적 조건을

마련하여야 한다.
4-36 여기서 6자회담을 잘 리용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이 회담을 우리의 핵을 없애는 회의가 아니라

우리의 핵을 인정하고 우리의 핵보유를 전 세계에 공식화하는 회의로 만들어야 하며 우리에 대한

국제적 제재를 풀게 하는 회의로 되도록 해야 한다.
4-37 미국, 중국, 로씨야, 일본과의 문제를 해결하면 그 외의 다른 나라들과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
4-38 유럽, 특히 북유럽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것도 놓치지 말아야 할 문제이다.
4-39 중국과의 관계를 잘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은 현재 우리와 가장 가까운 국가이지만 앞으로

가장 경계해야 할 국가로 될 수 있는 나라다.

력사적으로 우리나라를 가장 힘들게 했던 나라가 바로 중국이다.
4-40 이 점을 항상 명심하고 주의할 것. 국가의 골간을 지키고 그들에게 리용당하지 않도록 할 것.


* 김정은의 안전과 안녕
5-41 , , 국가안전보위부를 비롯한 중요기관들은 김정은의 안전과 안녕을 목숨으로 지킬 것.
5-42 신념이 없는 자 력사의 락오자로 떨어지고 만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나갈 때 비로써 앞날이 보이는 것이다.
5-43 당의 주위에 철통같이 뭉쳐 투쟁할 때 승리가 반드시 온다는 희망을 가지고 전진해야 한다.
5-44 맡겨진 혁명임무수행에서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혁명정신을 높이 발휘하며 언제나 어버이

수령님께서 자기를 내려다보고계신다는 마음을 안고 강성대국건설에서 혁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유코리아뉴스

첨부파일 군가 멸공의 횃불.mp3


 

 
출처 : 우대받는 세대
글쓴이 : 노라 원글보기
메모 :



      세계각국의 1인당 국민소득(2018년 4월 현재)
   1. 리히텐슈타인  $ 170,373
   2. 모나코  167,021
   3. 룩셈부르크 115,377
   4. 노르웨이 100,000 
   5. 카타르 92,682
   6. 스위스 85,800
   7. 호주 67,040
   8. 산 마리노 64,480
   9. 덴마크 60,000
   10. 스웨덴 57,134
   11. 쿠웨이트 57,102
   12. 캐나다 50,565
   13. 네덜란드 50,215
   14. 싱가포르 50,100
   15. 오스트리아 50,000
   16. 핀란드 48,887
   17. 아일랜드 48,836
   18. 미국 47,882
   19. 벨기에 47,807
   20. 독일 44,000
   21. 일본 43,407
   22. 아이슬란드 43,240
   23. 아랍 에미리트 43,000
   24. 프랑스 42,642
   25. 안도라 41,517
   26. 영국 41,000
   27. 브루나이 40,301
   28. 뉴질랜드 36,874
   29. 이탈리아 36,124
   30. 이스라엘 32,123
   31. 스페인 31,820
   32. 키프로스 30,523
   33. 대한민국 25,167
   34. 그리스 24,251
   35. 슬로베니아 23,810
   36. 바하마 22,431
   37. 적도 기니 22,410
   38. 포르투갈 22,226
   39. 오만 22,100
   40. 대만 21,600
   41. 몰타 21,270
   42. 사우디 아라비아 21,262
   43. 체코 20,607
   44. 바레인 20,000
   45. 슬로바키아 17,545
   46. 에스토니아 16,542
   47. 트리니다드 토바고 16,272
   48. 바베이도스 15,744
   49. 가봉 15,738
   50. 칠레 14,400
   51. 크로아티아 14,217
   52. 헝가리 14,000
   53. 우루과이 13,820
   54. 폴란드 13,524
   55. 세인트키츠네비스 13,424
   56. 러시아 13,106
   57. 리투아니아 13,000
   58. 라트비아 12,700
   59. 브라질 12,600
   60. 앤티가 바부 12,480
   61. 세이셸 11,675
   62. 카자흐스탄 11,503
   63. 팔라우 11,100
   64. 아르헨티나 11,000
   65. 베네수엘라 10,731
   66. 터키 10,524
   67. 멕시코 10,063
   68. 말레이시아 10,000
   69. 레바논 9,165
   70. 루마니아 8,853
   71. 수리남 8,708
   72. 코스타리카 8,676
   73. 모리셔스 8,670
   74. 파나마 8,600
   75. 보츠와나 8,533
   76. 남아프리카 공화국 8,100
   77. 그레나다 7,868
   78. 도미니카 7,322
   79. 몬테네그로 7,200
   80. 불가리아 7,187
   81. 세인트 루시아 7,124
   82. 콜롬비아 7,100
   83. 이란 7,050
   84. 나우루어 7,000
   85. 아제르바이잔 6,813
   86. 몰디브 6,405
   87. 그레나딘 6,300
   88. 페루 6,138
   89. 쿠바 6106
   90. 벨라루스 5,768
   91. 세르비아 5,580
   92. 알제리 5,523
   93. 도미니카 공화국 5,512
   94. 나미비아 5,450
   95. 중국 5,440
   96. 자메이카 5,360
   97. 앙골라 5,318
   98. 태국 5318
   99. 투르크 메니스탄 5,042
   100. 마케도니아 공화국 4,925
   101. 리비아 4,885
   102. 동 티모르 4,830
   103.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4,807
   104. 벨리즈 4,636
   105. 요르단 4,556
   106. 에쿠아도르 4,526
   107. 피지 4,400
   108. 튀니지 4,373
   109. 통가어 4,335
   110. 알바니아 4,042
   111. 카보 베르데 3,773
   112. 이라크 3,758
   113. 투발루 3,713
   114. 엘살바도르 3,702
   115. 우크라이나 3,657
   116. 사모아 3,630
   117. 인도네시아 3,500
   118. 파라과이 3,485
   119. 마샬 군도 3,448
   120. 가이아나 3,408
   121. 스와질란드 3,400
   122. 조지아 3,320
   123. 아르메니아 3,270
   124. 콩고공화국 3,200 
   125. 과테말라 3,178
   126. 바누아투 3,168
   127. 모로코 3,107
   128. 시리아 3,100
   129. 몽골 3,060
   130. 미크로네시아, 2,855의 연방
   131. 스리랑카 2,812
   132. 이집트 2,801
   133. 코소보 2,618
   134. 볼리비아 2,374
   135. 필 리핀 2,370
   136. 부탄 2,336
   137. 온두라스 2,250
   138. 팔레스타인 2,112
   139. 몰도바 2,000
   140. 키리바시 1,803
   141. 파푸아 뉴기니 1,794
   142. 우즈베키스탄 1,641
   143. 수단 1,583
   144. 웨스트 사하라 1,577
   145. 가나 1,570
   146. 인도 1,528
   147. 상투 메 프린시 페 1,520
   148. 솔로몬 제도 1,518
   149. 나이지리아 1,510
   150. 잠비아 1,426
   151. 남 수단 1,420
   152. 지부티 1,417
   153. 베트남 1,400
   154. 카메룬 1,320
   155. 라오스 1,303
   156. 예멘 1,270
   157. 모리타니 1,254
   158. 니카라과 1,243
   159. 티벳 1,218
   160. 코트 디부 아르 1,200
   161. 파키스탄 1,182
   162. 미얀마 1,144
   163. 세네갈 1,132
   164. 레소토 1,114
   165. 키르기스스탄 1,100
   166. 북한 1,074
   167. 위구르어 1,040
   168. 타지키스탄 935
   169. 차드 912
   170. 캄보디아 900
   171. 케냐 820
   172. 코모로 810
   173. 베냉 802
   174. 짐바브웨 740
   175. 방글라데시 706
   176 .감비아 688
   177. 말리 671
   178. 아이티 665
   179. 네팔 637
   180. 토고 620
   181. 부르 키나 파소 610
   182. 기니 비사우 600
   183. 르완다 583
   184. 우간다 558
   185. 기니 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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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 탄자니아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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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lacies in the Allied Nations’ Historical Perception as Observed by a British Journalist: by Henry Scott Stokes, 2013.
[영국 헨리 스톡스 기자가 본 동맹국들의 역사인식 오류]

 

5.18 광주사태 이후 사형언도를 받았던 김대중의 구명운동 에 앞장섰던 당시 뉴욕타임즈 영국특파원 헨리 스톡스가 30여년이 지난 이후, 김대중은 사적 이익에 몰두하였고, 카멜레온 같은 변신 정치인, 민주주의를 속인 정치인, 친북정치인이며, 광주5.18은 김대중이 기획한 반란이었다고 폭로하였다. 그는 기자로서 사실들은 일찍이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 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고백하였다.

 

Chapter 8: Asian Leaders I Have Met
(제8장: 내가 만났던 아시아의 지도자들)

 

1. SELF-INTEREST-DRIVEN KIM DAE-JUNG
(자기사적 이익에 몰두하는 김대중)

A Chameleonic Politician :   카멜레온 식 변신 정치인

In 2000, Kim Dae-jung won the Nobel Prize for Peace. That same year he visited North Korea for the first time as president of South Korea. Kim was awarded the prize for his contributions to peace between the North and South. The question is: Did North-South Korean relations improve due to his visit? The value of the Nobel Prize for Peace is often questioned when it comes to who receive it.


   2000년 김대중은 노벨상을 받았다. 그 당시 그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처음 북한을 방문하였다. 그는 남북한 평화증진에 기여한 공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문제는 그의 방문으로 인하여 남북관계가 향상되었는가이다. 노벨 평화상의 가치가 자주 받는 사람에 따라 의문시된다는 것이다.
  
President Obama also won the Peace Prize, in 2009, but this was merely nine months after he took office, enjoying unprecedented popularity. The reason he won the prize is that he called for the abolition of nuclear weapons in his speech in Berlin. He could have also called for the eradication of all diseases on earth.
오바마대통령도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리면서 대통령취임 후 9개월만에 200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가 수상한 이유는 베를린에서 핵무기를 폐기하자는 그의 연설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또한 지구상의 모든 질병의 근절을 촉구할 수 있었다.
  
In 2013 the Nobel Peace Prize was given to the OPCW (Organization for the Prohibition of Chemical Weapons), which was founded in accordance with the Chemical Weapons Convention, a worldwide treaty that bans chemical weapons. The prize won public attention, with perfect timing, as an operation to destroy chemical weapons in Syria had just begun. But we still don’t know whether this operation was successful.


2013년 노벨 평화상은 화학무기금지단체인 OPCW에 주어졌다. 이 기구는 화학무기 금지세계조약인 [화학무기 회의] 출범에 부응하여 창립되었다. 그 당시 평화상은, 시리아 내 화학무기에 대한 파괴작전이 막 시작할 무렵이었으므로 그 적시성으로 인해 대중의 주의를 끌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작전이 성공적이었는지의 여부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다.

 

In the previous year, the same prize was given to the EU, the economy of which had collapsed; the EU is still in the middle of an economic crisis. In England, public opinion has shifted to support for breaking from the EU.
지난해는 유럽연합에 평화상이 수여되었다. 그 해 EU의 경제는 몰락하였고, 아직 위기의 와중에 놓여 있다. 영국의 여론은 EU에서 탈퇴를 지지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I interviewed Kim Dae-jung over a dozen times. He was the highest-ranking among the VIPs I met in Japan and other Asian countries. Kim was born in a small village in a province then called Jeolla; it is currently known as Jeollanam-do, in the southwestern part of South Korea. He was a man who was always especially conscious of how the media portrayed him.
나는 김대중과 10회이상 회견을 가진 바 있다. 그는 일본과 여타 아시아 국가에 만났던 주요인사(VIP)중 최상위 인사이었다. 그는 남한의 남서부지역 ‘전라남도’라고 알려진 전라도(Province)의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언론매체가 자기를 어떻게 묘사하는가에 항상 특별히 의식하였다.

 

He was like a chameleon, tailoring his attitude and policies to whatever situation he faced. He did not join his country’s own army, rather he volunteered with the Imperial Japanese Army and served for a while. During WWⅡ, he wore the rank-and-file uniform of the Imperial Japanese Army.
When he visited North Korea for the first time as the president of South Korea. He won the attention of the entire world.


그는 자기가 직면한 상황에 따라, 자기의 태도나 정책을 맞추는 마치 카멜레온과 같이 변신하였다. 그는 그의 조국의 군대에 입대하지 아니하였다. 대신 일본제국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잠시 복무하였다. 2차세계대전 중, 그는 일본제국 군대의 계급이 부착된 제복을 입었다.
그가 남한의 대통령으로서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 그는 전 세계의 주의를 받았다.

 

Kim Dae-jung Posed as a Pro-Democracy Activist
친 민주주의 행동가 모습의 김대중

 

I first met Kim Dae-jung in the 1970s, when he was still in the opposition. He was promoting movement in South Korea, staying alternately in Japan and in America. He was the focus of attention as a human rights activist.
   나는 1970년대 김대중이 야권에 있을 때,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일본과 미국을 번갈아 머무르며, 한국에서 운동권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그는 인권행동가로 대중적 주의의 중심에 있었다.
  
On August 8, 1973, Kim disappeared from the Hotel Grand Palace in Kudanshita, Tokyo. The KCIA (Korean Central Intelligence Agency) had abducted him. He was taken to a ship, which then left from a Japanese port. The abductors wanted to murder him, right there on the ship, at sea. Suddenly, military aircraft flew overhead, circling the ship. The abductors gave up on murdering him.
   1973년 8월8일 김대중은 도쿄 구단쉬타에 있는 Grand Palace 호텔에서 사라졌다. 한국의 중앙정보부가 그를 납치 하였다. 그는 배에 옮겨져 일본항구를 떠났다.
납치자들은 공해상의 배위에서 그를 살해하려고 하였다. 갑자기 그때 배위에서 군용헬기가 선회하고 있었다. 마침내 납치자들은 그를 살해하려던 계획을 포기하였다.
  
   Then he was put under house arrest, and later jailed in 1976 after publishing his “Declaration of Democratic Salvation.” In February 1980 his civil rights were restored, but in May he was arrested again.
This became the cause of the Kwangju Incident. The Army suppressed demonstrators who demanded democracy; this led to much bloodshed.
   그 후 그는 가택 연금되었고, 1976년 ‘민주구국선언’을 선포한 이후 다시 영어의 몸이 되었다. 1980년 2월 그는 공민권이 회복되었으나 5월 다시 체포 되었다 그에 대한 체포가 광주사태의 원인이 되었다.
군부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데모군중을 압박하였으며, 이로 인해 유혈사태로 확대되었다.

 

Kim Dae-jung was extremely attentive towards America. He was against the continuing stationing of the US Army in South Korea. His protests were really aggressive, so a lot of attention was paid to him. Nobody else protested as aggressively as he did. Whenever he accepted my interview, he posed an image of himself as a fighter of the democratic movement.
김대중은 미국에 대해 극단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주한미군의 지속적인 주둔을 반대하였다. 그의 반대는 급진적이었으므로 그는 많은 감시를 받았다.
어느 누구도 그가 행한 것처럼 공격적으로 항거하지 아니했다. 그가 나의 회견을 수락하였을 때도, 그는 자신을 민주화 운동의 투사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내세웠다.

 

   In the late 1970s President Park Chung-hee was assassinated. Park was in office from 1961 till the 1970s. Immediately after his assassination, the military took control of administration. The military headquarters saw Kim Dae-jung as a key anti-army, pro-democratic leader. The Army planned to kill its enemy.


   197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은 살해되었다. 그는 1961년부터 1970년대 말까지 대통령직에 재직하였다. 그의 서거 후 즉각 군부가 행정을 통제하였고 군부의 본부는 김대중을 군부반대세력이며 민주화 지도자의 핵심인물로 꼽았다.
  
   I called on Kim Dae-jung at his residence. He was under house arrest, and army security and surveillance were extremely tight. Visiting him at his residence several times as The New York Times correspondent, I noticed that he had a special preference for that newspaper. There was a clear difference compared to that of other news reporters. His residence was the largest in the neighborhood, and was always surrounded by media. But as soon as Kim learned about my arrival as The New York Times correspondent, he always let me in.


   나는 김대중이 가택 연금되어, 군 안전 요원의 감시가 극히 강화되었을 때, 그의 주택을 방문하였다. 뉴욕타임즈 기자로서 수차 그의 주택을 방문하면서, 나는 그가 뉴욕타임즈 신문을 특별히 선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른 기자들에 비해 분명히 차별성이 있었다. 그의 주택은 주위에서 가장 컸고 항상 언론매체들에 둘러 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뉴욕타임즈 특파원으로 한국에 도착한 것을 알고부터는 언제나 항상 방문을 허용하였다.
  
It was America that saved him. America’s private organizations and media opinion backed Kim Dae-jung, and The New York Times was at the forefront. In the spring of 1980,I was based in Seoul, and traveled back and forth between Tokyo. Kim was at the peak of his life when I repeatedly met and interviewed him. I wrote that Kim Dae-jung was the central figure of the democratic movement in Korea. I insisted in an editorial that he not be executed, no matter what rationale was given.

   김대중을 구한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의 사설기관이나 언론매체는 그를 지원하였으며, 뉴욕타임즈가 그 선두에 있었다. 1980년 봄, 나는 서울에 주로 머물면서, 도쿄를 자주 오가며 지냈다. 내가 반복해서 김대중을 만나고, 회견할 때, 그는 자기 인생의 정점에 있었다. 나는 김대중이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중심적인 인물이라고 보도하였고, 사설에서 어느 합리적인 이유가 제시되더라도 그는 처형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주장하였다.
  
The Man Who Plotted the Kwangju Uprising
광주봉기 기획자

But Kim Dae-jung was a fake, not a real person. He was an imposter and a pretender. He was an actor who tried at all times to take advantage of a situation by controlling people’s feelings. He was not what he pretended to be. I was deceived by him, and so were many of the Korean people. He was brilliant in this respect; his act of deception was never uncovered.

그러나 김대중은 진실한 사람이 아니라 가짜였다. 그는 사기꾼이자 2중인격자이었다. 그는 항상 사람들의 감정을 통제하여 상황을 이용하려고 노력한 배우였다. 그는 겉과 속이 달랐다. 나와 많은 한국인이 그에게 속았다. 그는 속임수의 능수이었으나,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

 

Kim Dae-jung’s biggest crime was that he deceived democracy. He was never criticized for this, not even once. The Kwangju Uprising made his fraud clear. In 1980 he was arrested by Chun Doo-hwan, who was at the pinnacle of the military. Kim knew, more than anybody else, that he was the wire-puller, the man behind Kwangju. What Kim Dae-jung wanted was power; what he always had in mind was his position. During the Kwangju Uprising, what he had in mind at all times was himself and seizing power.

김대중의 가장 큰 범죄는 민주주의를 속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로 인해 결코 한번도 비판을 받지 않았다. 광주항쟁으로 인해 그의 사기행각이 밝혀졌다. 1980년에 그는 군대를 장악한 전두환에게 체포되었다. 김대중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 자기 지원세력인 광주인과 관계에 있어 자기가 인계철선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권력이었고, 염두에 두었던 것은 권력을 여하히 쟁취하는 것이었다. 광주봉기기간 동안에도 그가 항상 염두에 두었던 것은 권력장악이었다.

 

Twenty years after the Kwangju Incident, in 2000, I compiled a book entitled The Kwangju Uprising as chief editor, with Lee Jae-eui, and published it with a New York publisher. Ten western and another ten Korean journalists who reported the incident back in 1980 wrote about what happened in Kwangju at that time. Through this book, what we couldn’t report at the time the uprising occurred became clear. All contributors freely wrote their recollections and experience.


광주사태 20년후 2000년에, 나는 주필로서 이재의와 함께 ’광주봉기’(The Kwangju Uprising)를 편집, 뉴욕 출판사의 협력 하에 출판했다. 1980년 사건보도에 참여했던 10명의 서양언론인과 10명의 한국언론인은 그 당시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썼다. 이 책을 통해, 반란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사태를 분명하게 보도할 수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3년 현재), 각 집필자는 자유롭게 과거 상황을 회상하고 경험을 토대로 집필하였다.

 

Actually, the Kwangju Uprising was the “Kim Dae-jung Uprising.” It was an extraordinary effort by a rising politician who planned to be president, who eventually became so, and who aimed at bettering relations with North Korea. I did not see, even after twenty years, the sort of magic that Kim Dae-jung worked. The rest of us, we twenty reporters, were simply puppets in his grand scheme.


사실, 광주봉기는 “김대중의 봉기”이었다.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떠오르는 정치인의 특별한 노력이었으며, 결국 대통령이 되었고,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겨냥하고 있었다. 나는 20년이 지난 현재, 김대중이 행한 마술과 같은 술수를 보지 못했다. 나머지 20명의 기자들도 그의 거대한 기획 하에 단순한 꼭두각시에 불과하였다.

 

My dear wife, who is Japanese but is very shrewd on political issues, not least on Korea, said, “You’d better watch out. This is a Kim Dae-jung-led exercise.” She said this from the beginning. When I review this now, yes, it was of his making. Kwangju was Kim Dae-jung’s political base, but the people there were stomped on viciously by the military, by the armed services. This was not Kim Dae-jung’s doing at all, but unfortunately, it was his strategy. It was exactly what he intended.
I did not understand that the role of this man could be such from inside prison, a person incarcerated in Seoul.


나의 아내는 일본인이지만 정치적 이슈에 매우 이해가 빨랐고, 한국에 관한 한 말할 나위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주의하라, 이것은 김대중이 지휘하는 연출 행위이다"라고 하였다. 그녀는 애초부터 그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 회상해보니, 그녀의 말이 옳았고. 그때 광주봉기는 그가 일으킨 것이었다. 광주는 김대중의 정치적 기반이었으며, 광주시민들은 군사적으로 무장하고 악의적으로 날뛰었다. 이것은 김대중이 전혀 외부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그의 전략이었다. 그것은 그가 정확하게 의도한 바였다. 나는 그가 수감자로서 서울의 감옥 안에서 그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Kim Dae-jung was saved by associates of Ronald Regan, who later became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In the fall of 1980, they secretly made an agreement with President Chun Doo-hwan, who was in control of the military. Chun Doo-hwan promised not to execute Kim Dae-jung on the condition that he (Chun) be invited, as the first Korean head of state, to the United States by the newly elected President Ronald Regan. Regan pleaded to not have Kim Dae-jung executed because the image of Kim as a leading figure of the democratic movement in Korea prevailed in America.


김대중은 후에 미국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gan)의 동료들에 의해 구원받았다. 1980년 가을, 그들은 군대를 장악한 전두환대통령과 비밀리에 합의했다. 전두환은 새로 선출된 레이건 대통령에 의해 처음으로 한국의 국가 원수로 초청되는 조건으로 김대중을 처형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레이건은 한국에서 민주주의 운동의 주도적인 인물인 김씨의 이미지가 미국에서 우세했기 때문에 김대중을 처형하지 말라고 탄원했다.

 

When the uprising was planned by the supporters of Kim Dae-jung and when Kwangju was occupied, the Western media reported, across the board, that Kim was a “good guy” who promoted democracy. In contrast, the army was the “bad guy.” This good-guy bad-guy syndrome lasted for years. We still haven’t recovered from it.


그 봉기는 김대중 지지자들에 의해 기획되고 광주가 점령됐을 때, 서방 언론은 김대중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외에 보도했다. 대조적으로 군대는 "나쁜 사람"이었다. 이 훌륭한 사람, 나쁜 사람 증후군은 수년간 지속되었다. 우리는 아직 그 증후군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Even now in America, Kim Dae-jung is believed to be a hero of the democratic movement in South Korea. But Kim was not a good guy. I regret that I was not aware of this at all. In Kwangju more than 300 people were killed. They were not only civilians, but soldiers as well. Kim Dae-jung should have been called out for responsibility. All of these people surrounding Kim Dae-jung, who instigated the Kwangju Uprising, knew how down-to-earth Kim Dae-jung was, and how avidly he pursued money, status, and power. His purpose in coming to power was to accumulate wealth for his family. People around him knew all of this from the beginning, but they hid these facts from the foreign media.

현재까지 미국에서 김대중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영웅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을 현재 후회한다. 광주에서는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그들은 민간인 뿐만 아니라 병사들도 포함되었다. 김대중은 그 책임에 대해 (국민 앞에) 불려 나왔어야 했다. 광주봉기를 선동했던 김대중의 주위 사람들은 모두 김대중이 어떻게 살았는지, 얼마나 돈과 지위와 권력을 추구했는지를 알았다. 권력을 얻으려는 그의 목적은 그의 가족을 위한 부를 축적하는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외국 언론에게는 이러한 사실을 숨겼다.

 

Regret at Not Having Been Aware of the Facts
(나의 위에서 언급한) 사실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But what is more sinful than accumulating wealth was his act of selling his own country, equivalent to treason. I refer, of course, to relations with North Korea. Kim Dae-jung was deeply corrupt. Soon after he became president, a popular joke among ordinary people was that his real name was Kim Dae-ho, meaning money-lover. Korea belongs within the sphere of Chinese civilization, after all. The peninsula is an extension of China on the Asian continent, unlike Japan. Historically, rulers of China and Korea were crazy about embezzlement. Kim Dae-jung was one of those rulers. Posing as a democratic hero of Korea, he made up his mind to get the Nobel Prize for Peace solely for its prestige.

그러나 재산을 축적하는 것보다 더 죄가 되는 것은 반역과 대등한 자기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였다. 나는 물론(김대중의)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김대중은 심하게 부패했다. 그가 대통령이 된 직후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흔한 농담은 그의 진짜 이름이 돈을 사랑하는 금대호(金大好)라는 것이었다.
 한국은 결국 중국 문명권에 속한다. 한반도는 일본과 달리 아시아 대륙에서 중국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과 한국의 통치자들은 (국가재산을) 횡령하는데 몰두하곤 하였다. 김대중은 그러한 통치자 중 한 사람이었다.
한국의 민주화의 영웅으로서 자리매김한 김대중은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노벨 평화상을 받으려고 결심하였다.

 

When I first visited South Korea in 1968, the country was still poor. Park Chung-hee built modem Korea. Park was educated during Japanese rule and became an officer of the Japanese Army in Manchuria. He disciplined him-self in the rectitude of the Japanese spirit. Making use of the material and spiritual assets Imperial Japan left in Korea, he changed Korea into a modem state in two decades. Had he not been assassinated, he would have attained a lot more.


1968년 내가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은 여전히 가난했다. 박정희는 (2차대전후) 모델이 될 수 있는 국가를 건설했다. 그는 일본 통치 하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만주의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 그는 엄격한 일본 정신(문화) 속에서 그 자신을 연마하였다. 한편, 그는 제국주의 일본이 한국에 남긴 (물적)재산과 정신적 자산을 이용하여 20년후에 한국을 (2차대전후) 모뎀국가로 바꾸었다. 만일 그가 암살되지 아니했다면 그는 더 많을 일을 달성했을 것이다.

 

In the 1960s and 1970s Korea, I was always next to danger. I was a target of assassination because, as a correspondent, I was writing about things the South Korean administration and army did not want to be reported. The American ambassador to Japan, Mr. Mansfield, proposed that he send a senior staff member as my bodyguard to ensure that nothing happened to me on trips to Korea. I declined his offer. But the embassy received information through the KCIA that plans had been made for me to have an accident, probably an accident on the street. It didn’t have to be a knife or pistol. That threat went on for about six months during and after the Kwangju Uprising.


1960년대와 70년대 나는 항상 내 주위에 위험이 도사 리고 있었다. 나는 특파원으로서 한국정부와 군부가 보도되 지 않기 바란다고 쓰고 있었기 때문에, 암살목표이었을 것 이다.
당시 주일 미대사 맨스필드는 내가 한국에 체류하는 중 나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하여 안전요원으로 직원 1명을 보내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주일 대사관은 한국 중앙정보부로부터 나에 대해 어떤 사건, 아마도 거리에서 사고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정보를 받았다고 했다. 칼이나 권총저격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위협은 광주사태 전후 6개월간 지속되었다.

 

We don’t have anything like that today. I don’t think there is any Western journalist who is threatened in the way that I was. That’s generally true right across society. There was an acidic atmosphere, a sort of toxic atmosphere in the ‘60s, ‘70s, and ‘80s.
우리들 특파원들은 2000년의 오늘날과 전혀 달랐다. 나는 현재 과거 내가 경험했던 방식으로 협박을 받는 기자들 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60년대, 70년대, 80년대 언론 보도에 있어서 일종의 거부적인 분위기, 껄끄러운 분위기가 존재했었다.

 

A friend always said, “I can’t trust Kim Dae-jung. He is in the pocket of North Korea. He’s working for the North, not for the South” I rebutted his accusation, saying, “That’s ridiculous. He has contributed to the democratization of South Korea. He’s Christian, and a sincere and honest man.” But I was wrong.

내 친구는 항상 나는 김대중을 신뢰하지 않아, 그는 북한의 포켓 안에 있고, 남한보다 북한을 위해 일하고 있다 고 말하였다. 나는 그의 주장은 김대중에 대한 조롱이라고 비난하고, 그는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하였고, 기독교인이며,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 두둔하였다. 그러나 내 주장은 잘못되었다.

 

As soon as he was elected president, Kim proved that his government was a puppet of the North. I just regret I hadn’t been more aware as a journalist.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마자, 그의 정부는 북한의 꼭두각시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나는 기자로서 일찍이 알아 차리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自然의 품 속에서
健康한 삶 을 !
From 曙岩






 ;

 

 想起하자  6.25 韓國戰爭

 

 

6.25 動亂 參戰 犧牲者

 

美國軍은

전사자 33,665명

비전투 희생자 3,275을 포함하여

총 36,940명의 젊은 목숨을 바쳤다.

 

또한 103,284건의 작전에서 92,134 명의 전상자를 냈으며

총 1,789,000명의 미군이 1950.6.25일부터

1953.7.27일까지 한국전쟁에 참전 했으며

아직도 8,176명의 실종자를 남기고 있다.

韓國軍은

전사자 415,004명을 포함하여

총 1,312,836 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U.N 軍은

전사자 3.094명을 포함 총 16,532명이 희생되었다.

 남하하는 피난민 행열




 

 

 

1950. 10. 10. 함흥 부근의 한 동굴에서 
 
공산군에 확살된 300여 명의 시신을 꺼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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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병들의 마지막 증언] "60년 전, 사선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하신 분들은 아래 링크에 접속하여 동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1부 :
http://youtu.be/UXxWnF0k1tU

2부 : http://youtu.be/4nzudOu2WqU

3부 : http://youtu.be/slVPuFrfuWc

4부 : http://youtu.be/y249Y47m7Kc

5부 : http://youtu.be/ze5gmZgoqQ8

국방홍보원 특별기획 [SNS MINI-DOCU : 6·25] "60년 전, 사선에서"!

노병들의 6·25에 대한 생생한 마지막 육성 증언입니다.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늙은 노병에게서 직접 듣는 6·25 전쟁 이야기...

2009년 발견된 6·25전쟁 종군기자들이 촬영한 미공개필름 '정의의 진격'

의 장면과 당시 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Click!'몰카 - 변태 여의사' ♡재미동영상♡(Full-Screen)

Click!'30cm 대왕조개, 잡을 때 손가락 잘릴지도 몰라요!

Click!Kings and Queens 2014년 영국의 갓탈렌트대회




출처 : 황혼의 멋진 삶
글쓴이 : 철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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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만원] 5.18 최종보고서 (요약)- 길이: 3:30


      

     

      

     

     

    출처 : 이상은 유투브(youtube.com)에 올려진 영상 일부를 발췌공유합니다.

     

    Click!이주천(미래한국 편집위원)과 윤용(부추연)교수께서 바라보는 조국을 살펴본다

    Click!기네스북에 올라갈 박근혜대통령님?거짓말 쌍두마차 박지원과 박원순(16.7.28)

    Click!새누리당 이정현대표님 옆사람을 살펴보고 개들의 합창을 막아주세요!

     

 

출처 : 황혼의 멋진 삶
글쓴이 : 철마 원글보기
메모 :

김동길교수님의 짧은 한마디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대통령에게 책임 있다면

그것은 너무도 무리한 요구일 것입니다.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나는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도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제35대 대통령 죤-에프 케네디의 말이 기억납니다.


 아~ 5.16. 신의 은총이 이 땅에 내린 날


박정희 장군이 제대를 하고, 사회에 나와 자신의 고향인

대구 근교에서 여당이던, 야당이던 국회의원에

출마하였으면 당선이 되었을까? 

99.999 % 낙선이 되었을것이다!


당시 박정희가 누구인줄 대구 시민들은 몰랐다. 


당시는 금품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고무신, 막걸리, 국밥, 양은냄비, 비누, 수건 등을

뿌리지 않으면 당선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당시 박정희가 돈이 어디 있었나? 

청렴 강직하기로 소문이 났던 박정희가 무얼 뿌린단 말인가?


  당선은 택도 없는 소리이다. 


대선출마? 미쳤나? 
박정희가 이런 바보짓을 하지 않은 게

오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천만다행한 일이지만,

 60년 전통 야당을 운운하는 자 들에게는

비극이요, 재앙인 일이었다.


역사에는 만일이라는 가정이 없다고는 하지만

5.16을 맞으면서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재삼 생각해 보아도 박정희가 선택한

구국의용단은 옳았고,

 그래서 우리는 박정희이름 석자 앞에

위대한 이라는 형용사를 아낌없이 붙인다!



위대한 박정희의 등장에 최대 피해자라고 자처하는

60년 전통 야당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는 좌파들은 

사실 피해자가 아니라 수혜자 이기는 마찬가지 이다.

 

왜냐 하면, 박정희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

싸우면서 건설하자고 당시 국민들과 피와 담을 흘릴때,

당시 야당 정치인, 좌파들은 박정희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반대, 발목잡기에 혈안이었으니까? 

아무것도 한일도 없이

그들도 뒤로는 역시 부자가 되었지 않는가?

 

박정희가 공업정책을 세우면, 농업정책이

우선이라고 거품을 물었고,

 고속도를 딱는 현장에

김대중은 땅바닥에 들어 누워

발광을 한 것은 당시 신문보도,

사진으로도 남아 있지 않은가?

 

그때의 야당 정치인들과

오늘 박정희의 딸 박근혜 정부의 3년여 동안

 반대와 발목잡기에 혈안인 야당과 과연 무엇이 달라졌을까?


독자들 중에 누가 한번 대답 좀 해보시라!

 

위대한 박정희는 당시 오늘과 같은 반대를

제 2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신을 일으켜

기여코 한강의 기적을 창출케 했다. 

정말로 위대하고, 또 위대했다. 


이런 말은 글이나 쓰고, 말이나 해서 먹고 사는

이 나라 언론인, 평론가, 정치인들은

공개적으로 못하는 말이다.  

우리 같은 쫄장부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지! 

혹자는 박정희를 공과를 따져가면서 평을 한다!


 혹자는 박정희가 민주 질서를 파괴한

독재자라고 악평을 한다. 

정말 구상유취 같은 소리들을 하고 있다.


박정희는 우리 민족 5천년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돼지고기 국에 흰 쌀밥을 싫컨 먹어 보는 게

소원인 위대한 수령의 나라 북한을 보라! 

조선의 딸들이 되넘의 늙은 총각에게 씨받이로,

 노리개로 팔려가는 어버이 수령의 북한을 보라!

 

수백만의 주민을 굶겨 죽인 위대한 원수,

 김일성 동지가 만든 지상 낙원을 보라! 


최고 존엄의 그림자를 밟으려고 했다고

기관 단총 세레에 화염방사기 추가 써비스를 해주는 

떠오르는 태양 김정은의 나라를 보라!


박정희의 공과가 어떻다고? 

박정희가 민주 질서를 파괴한 독재자라고? 


인간의 탈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비록 입은 삐뚤어 졌어도 말 만은 바로 하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먹는 것을 해결해주고,

오늘 세계에서 12번째로 잘살게 해주고, 

세계 5대 첨단공업국, 6대 무역강국,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워준 위대한 박정희를

욕하는 자들은 인면수심의 동물 같은 자들이다.



위대한 박정희는 모든 것을 혼자 질머지고

저승세계로 갔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인간들!


너희들은 얼마나 잘났고,

얼마나 완벽한 인간이길래 

입만 열면 민주주의를 찾냐? 


도대체 너희들의 민주주의는 뭐냐?


 너희들 좌파 정권 10 년동안 무얼 했냐?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있다! 

5.16은 신이 한국인들에게 박정희를

앞세워서 준 은총이다.


 위대한 박정희의 명복을 정중히, 진심으로 빈다.

 




蓮 楚 咸 昌 岐
010-8934-2599
031-947-2599

  

 

 

🌺🍒*긴급*최고 기쁜소식🍒🌺

대한민국이 일본을 이겼음,
   우리나라'독도'외교부 홍보영상
   에서 만장 일치로 이겼습니다.!!
   기쁜 "소식"을 많이 퍼트립시다
.

👬🌷💑🌴💘.💚.💘🌴💑🌷👬
🌷독도는 한국영토 확인 되였음 
http://me2.do/xeDkNMtG

🌺 위의 영문을 누르시면

화면이 나옵니다.

첫번째 화살표>를
     누르시면

영어로 발표를 하며,

🍒두번째 화살표>화면을 누르시면

한국어로 번역하여 발표 하오니

잘 청취들 하시고

 여러분들께

빨리 알림을 전합시다~!

  

2016.6.7. 아띠할멈.(). 

http://cafe.daum.net/aznos






출처 : 즐거운 대전UCC
글쓴이 : 신바람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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