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자와 그의제자 안회의 일화(逸話)

안회(顔回)는 배움을 좋아하고 성품도 고와 공자(孔子)의

마음에 든 제자중의 하나였다.

하루는 공자의 심부름으로 장에 들렸는데 한 포목점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어서 무슨 일인가 해서 다가서 알아보니

가게주인과 손님이 시비가 붙은 것이다.

포목사러온 손님이 큰소리으로 "3x 8은 분명히 23인데

당신이 왜 나한테 24전(錢)을 요구하느냐 말이야"

안회은 이 말을 듣자마자

그 사람에게 먼저 정중히 인사를 한 후
"38은 분명히 24인데 어째서 23입니까?
당신이 잘못 계산을 한것입니다."하고 말을 했다.

포목을 사러온 사람은 안회의 코를 가리키면서
"누가 너더러 나와서 따지라고 했냐?
도리를 평가할려거든 공자님을 찾아야지...

옮고 틀림이 그 양반만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있다."


그럼 만약 공자께서 당신이 졌다고 하시면 어떻게 할건가요?"

"그러면 내 목을 내놓을것이다, 그런데 너는?"
"제가 틀리면 관(冠)을 내놓겠습니다."

두사람이 내기를 걸어 공자를 찾아갔었다.
공자는 사유 전말을 듣고나서 안회에게 웃으면서 왈

" 네가 졌으니 이사람에게 관을 벗어 내주거라."

안회는 순순히 관을 벗어 포목을 사러온 사람에게 주었다.
그 사람은 의기 양양히 관을 받고 돌아갔다.

공자의 평판에 대해 겉으로는 아무런 표현이 없었지만
속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스승이 이제 너무 늙었고 우매하니
더 이상 배울게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안회는 집안일 핑계로 공자에게
고향으로 잠시 다녀올것을 요청하였다.

공자는 아무 얘기도 하지않고 고개를 끄떡이면서 허락하였다.

떠나기 직전에 공자에게 작별인사를 하러갔었는데
공자가 일을 처리한
즉시에 바로 돌아올것을
당부하면서 안회에게 "두마디"게시를 해주었다.


《천년고수막존시, 살인불명물동수

千年古樹莫存身,殺人不明勿動手》

안회는 작별인사를 한 후 집으로 향해 달려갔다.
길에서 갑짜기 천동소리과 번개를 동반한 급소나기를 만나
비를 피할려고 급한김에 길옆의 오래된 고목 나무밑으로
뛰었들어갈려는데...

순간 스승이 첫 마디인
《천년고수막존신(千年古樹莫存身) 천년묵은 나무에서 몸을 숨기지말라》
말이 떠올라,
그래도 그 동안 사제(師弟)의 정을 생각해서
한번
들어
드리자해서 다시 뛰쳐나와는데
바로 그 순간에 번쩍하면서

그 고목이 번개에 맞아 산산조각이 되어 버렸던것이다.

안회가 놀라움에 금치못하고 스승님의 첫마디가 적중이 되었고...
그러면 두번째의 게시에 의하면 과연 내가 살인을 할 것인가?...

한참 달리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늦은 심야였다...
그는 집안으로 들어가 조용히 보검으로 아내가 자고 있는


내실의 문고리를 풀었다...

컴한 침실 안에서 손으로 천천히 더틈 만져보니
아니...
침대 위에 두사람이 자고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와 검을 뽑아 내리칠려는 순간
공자가
게시한
[두번째 말]이 생각이 난것이다..

《살인불명물동수(殺人不明勿動手) 명확치 않고서는 함부로 살인하지 말라》
얼른 초불을 켜보니 침대위에 한쪽은 아내이고
또 한쪽은 자신의 누이동생이 자고 있었다...

안회는 다음 날, 날이 밝기 무섭게 되돌아가

공자를 만나자마자 무릎을 꿇고 하는 말이
"스승님이 게시한 두마디 말씀 덕분에 저와 제 아내과
누이동생을 살렸습니다."

"어떻게 사전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계셨습니까?"


공자는 안회를 일으키면서 왈
"어제 날씨가 건조하고 무더워서 다분히 천동번개가
내릴 수가 있을 것이고 너는 분개한 마음에
또한 보검을 차고 떠나기에

그래서 그런 상황을 미리 예측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이어서 왈. "사실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지.
너가 집에 돌아간 것은 그저 핑개였고

내가 그런 평판을 내린 것에 대해 내가 너무 늙어서

사리판단이 분명치 못해 더 이상 배우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한번 잘 생각해보아라...

내가 3X8이 23이 맞다고 하면 너는 졌지만
그저 관 하나 준 것 뿐이고
만약에 내가 3X8이 24가 맞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목숨 하나를 내놓야 하지
않겠는가?

"너 말해 봐라!

관이 더 중요하냐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한가?"

안회가 비로소 이치를 께닫게 되어

"쿵"하고 공자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리면서 말을 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스승님은 대의(大義)를 중요시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시비(是非)를
무시하는 그 도량과 지혜에 탄복할 따름입니다."

그 이후부터

공자가 가는 곳마다
안회가 그의 스승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안회(顔回)


공자(孔子)








안회(顔回) 공자(孔子)


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때에는 당신의 고집한
소위 자신이 옳다고 하는 도() 억지로 이겨내었지만
이로 인해 가장 소중한것을 잃게 될 수도 있으며
 
매사에는 경중완급(輕重緩急)이 있는 법,

아무 의미 없는 체면, 쟁의, 분개 때문에
후회막심한 일이 절대로 발생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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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근본사상

 

공자에 의해 이룩된 종교?철학사상이다.
유학(儒學)ㆍ유도(儒道)ㆍ공교(孔敎)ㆍ공학(孔學)이라고도 한다.
유교의 근본사상은 인(仁)이다.
그런데 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공자의 답변은 일정하지 않았다.
제자들의 자질과 처지와 이해능력에 따라 그 깨우침을 열어주는 방향으로 답변을 해 준 까닭이다

공부자(孔夫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의 대사상가ㆍ교육자이며, 유교의 개조(開祖)이자 성인(聖人)다. B.C. 551년에 나셨으며, B.C. 479년에 돌아가셨다.
공(孔)은 성이고 자(夫子)는 남자의 미칭으로 '선생'의 뜻이며,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 추읍 ; 지금의 山東省 曲阜縣 남쪽 추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이다. 숙량흘이 60을 넘겨 공자를 얻었다 한다.

우리 유교의 역사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때, 당(唐)나라의 학제인 국학(國學)을 받아들인 때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즉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웠으며, 백제는 국학을 세운 기록은 없으나 285년(고이왕 52)에 이미 왕인(王仁)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유학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도 오래 전부터 전래된 것 같으나 국학의 건립은 훨씬 늦어 682년(신문왕 2)에야 실시되었다. 그 후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학문을 장려하고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설총(薛聰)은 이두(吏讀)를 창시하여 구경(九經)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부차적으로는 지도계급으로 하여금 경사(經史)에 통하게 하고 사부(詞賦)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유교가 한때 부진하였다가 992년(성종 11)에 비로소 국자감(國子監)을 세웠고 문종 때는 최충(崔沖)이 9재(齋)를 설치하고 학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무관의 발호와 계속된 전란으로 유교는 240년간이나 다시 침체상태에 빠졌다가 제25대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오면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입수해 온 후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을 세우고 대성전(大成殿)을 건립하여 공자를 존숭하는 등 유교 부흥에 힘썼다. 그는 또한 한국에 주자학(朱子學:性理學)을 처음 수입하였으므로 주자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의 문하에는 백이정(白燎正) ·우탁(禹倬) ·권부(權溥)등이 있어 모두 주자학 부흥에 힘썼으며, 그 학통은 고려 말의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등에게로 전승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 정몽주는 성리학에 정통하고 도덕과 경륜(經綸)에도 일가를 이루어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유교의 기초를 처음으로 확립한 학자는 정도전(鄭道傳)이다.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의 논설을 통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같은 시대의 유학자 권근(權近)도 많은 저술로 이에 동조하였다. 한편 고려의 유신(儒臣)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은 당대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그의 문인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은 가장 유명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희생되었다. 다시 조광조(趙光祖)가 유도(儒道)의 정치를 펴려 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실패하고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를 입었다. 이어 을사사화에는 이언적(李彦迪) ·노수신(盧守愼) 등의 거유(巨儒)가 유적(流謫)되었으며 거듭되는 사화로 유학자들은 차차 벼슬을 단념하고 산림(山林)에 숨어 오로지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게 되었다.

서경덕(徐敬德) ·조식(曺植) ·김인후(金麟厚) 등은 그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서경덕은 종래 답습하여 오던 주자의 이기이원론에 대하여 중국 장횡거(張橫渠)의 태허설(太虛說)을 이어받아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함으로써 한국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명종 ·선조 때에는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한국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이황(李滉:퇴계) ·이이(李珥:율곡)가 가장 뛰어나 이황을 ‘동방의 주부자(朱夫子)’, 이이를 ‘동방의 성인(聖人)’이라 할 만큼 그 학풍은 후대의 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황은 4단 7정(四端七情)의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여 많은 저술로써 이를 확립하였고, 그 학설은 일본에 전해져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를 비롯한 여러 주자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동양사상에서 한국의 성리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 공자의 생애에 대해 알려주세요~
  • 공자(孔子) 공자(孔子, 기원전 552년 - 기원전 479년)는 유교의 시조(始祖)로 떠받들어지는 중국의 사상가이다. 유교의 개조(開祖). 노(魯)나라 창평향 추읍(昌平鄕邑:지금의 山東省曲阜의 남동) 출생. 자는 중니(仲尼). 이름은 구(丘). 공자의 ‘자(子)’는 존칭이다. [생애] 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성은 숙량(叔梁), 이름은 흘(紇)이며 어머...더보기
출처 : Daum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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