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의 6인 사랑에 묻힌 예술 이야기를 알아보자!!

 

김일엽(金一葉) 수덕사 주지스님

출생:1896년4월28일 (평안남도용강)

사망:1971년1월28일 (壽. 75세)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한 맺힌 시를 쓰다가 불교에 귀의하면서 선시(禪詩)를 썼다. 본명은 원주(元周). 일명 하엽(荷葉)·백연도엽(白蓮道葉). 목사의 맏딸로 태어났고 일엽이라는 이름은 춘원 이광수가 지어주었다.

 

하엽은 불명(佛名), 백연도엽은 만공선사가 하명한 도호이다. 9세 때 신학문의 길로 들어서 진남포 삼숭여학교, 이화학당에서 공부했고 일본 닛신[日新]학교에 다니면서 신학문운동과 여성운동을 했다. 결혼에 실패한 뒤 분방한 사생활과 자유연애에 환멸을 느끼고 속세와 인연을 끊고 만공선사가 있던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불도를 닦았다.

 

12세 때 〈동생의 죽음〉이라는 신체시를 썼고 이화학당 시절 '이문회'(梨文會] 활동을 했다. 25세에 〈신여자〉를 창간했으며 나혜석·김명순 등과 자유연애와 여성해방을 부르짖었다. 남편과 이혼 뒤에 1920년 10월 YMCA에서 여성교육과 사회문제에 대한 강연을 했으며 〈폐허〉 2호에〈먼저 현상(現象)을 타파하라〉등의 글을 발표했다. 〈백과사전 글)

 

#,아래 파란만장의 인생역정을 한번 읽어보면서 지나온 길에 드리운 그림자를 한번 뒤돌아 봄이 어떠할 런지 우리들의 인간사가 지나고 보면 한 낟 나그네 일뿐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지 않나 합니다. 그렇다고 허무한 것은 아니올시다. 왜냐 구요! 나그네가 지나온 길에도 그림자는 있었으니까요 이는 일엽스님에 대하여는 춘원 이광수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인공으로만 알았는데 내용을 알고 보니 춘원이 그의 간결하고 깨끗한 문채에 반하여 하나 밖에 없는 여류작가라는 뜻으로 하나의 잎새라는 호를 지어준 인연만 있답니다.

 

한국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버리고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 견성 암에서 탄옹 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다..

 

#,수덕사의 세 여자와 세 남자의 이야기가 유명하니 살펴보기로 하자.

세 여자란? 김일엽시인. 나혜석화가. 박귀옥(이응로화백본부인)

세 남자란? 송만공스님, 이응로화백, 김태신,화가 일당스님,(김일엽과 일본인 사이에 난 사생아) 를 말한다,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초가집 한 채는 유명한 당대에 쌍벽을 이룬 (수덕여관)김일엽스님과 나혜석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나혜석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출생: 1896년 4월 18일, 경기 수원

사망: 1946년경, 서울(壽. 50세) 

 

나혜석 :호는 정월(晶月).

 

신문학을 존중하는 개화된 가정에서 기정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도쿄에 유학중이던 오빠 경석의 권유로 1913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유학시절에는 최승구·이광수와 사귀면서 동경 유학생 동인지였던 〈학지광〉에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이상적 부인〉 등의 글을 발표했다.

 

1918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함흥 영생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3·1운동에 참가 후 체포되어 수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고, 남편의 도움으로 1921년 서울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첫 전람회를 열었다.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전시회로, 〈매일신보〉의 기사에 의하면 "낙역부절하여 인산인해"(絡繹不絶人山人海)였다고 한다. 1923년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된 남편을 따라 만주에 거주했다.

 

 

나혜석의 자화상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1927년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영국·이탈리아·스페인 등을 여행하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견학하고 파리에서는 야수파 계열의 그림을 그렸다. 제1~11회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9번 출품하여 제3회 때 〈가을의 정원〉으로 4등상, 제4회 때 〈낭랑묘 娘娘廟〉로 3등상, 제5회 때 〈천후궁 天後宮〉으로 특선을 받았다.

 

유럽 여행중 사귄 최린과의 만남이 문제가 되어 귀국한 뒤인 1931년 이혼했다. 그뒤 사회의 인습적인 도덕관에 저항하는 〈우애결혼, 실험결혼〉·〈이혼고백서〉 등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글을 발표했으나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그뒤 수덕사·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가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자화상〉(1928)에서는 강한 색채의 대비적 효과를 살린 표현기법으로, 〈스페인 해수욕장〉(1928경)·〈불란서 마을 풍경〉에서는 거침없는 필치에 자유분방한 기법으로 야수파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1931년 이혼 이후 생활과 정신의 불안정을 반영하듯 작품에는 생동감과 활발함이 사라졌으며 작품창작도 거의 하지 않았다.<백과사전>

      

나혜석은 1934년 이혼 후 극도로 쇠약한 데다. 어린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 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 또 한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일엽이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김일엽은 만공스님을 주선한다. 몇 년 전 경성에서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 김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 된 다라고. 면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같이 머리 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만공선사로 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한 나혜석은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5년 동안 이나 머무르며 ?중 시켜달라고? 1인 시위하면서 버티는 한편 붓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며 찾아오는 예술인과 소일한다.<받은글 공유>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수덕사로 김일엽스님을 찾아온다. 그 소년은 김일엽이 일본인 와다 세이죠와의 사이에서 낳은 김일엽의 아들 김태신이다. 모정에 목말라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 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 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 라고 느낀 나혜석은 모정에 굼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준다. 나혜석은 역시 모성애에 주려있는 세 아이의 엄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을 보고 중노릇은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받은 글 공유)

 

본 도쿄 일엽 스님 아들’ 일당 김태신 스님 원적

기구한 운명의주인공이자 화승으로 이름난 일당(日堂) 김태신 스님이 원적에 들었다,세수는 92,법랍은 27. 스님은 1922년 일본 도쿄에서 명문가 출신으로 오다 세이조와 한국인 유학파 신여성 (김원주) 김일엽(1896~1971)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리를 지낸 인물로, 두 사람은 집안의 반대로 결혼을 하지 못했다. 아들을 일본에 남겨 두고 귀국한 어머니 김원주(김일엽)는 문인으로 활약하다 훗날 출가해 수덕사에서 수행하면서 한국 불교 최고의 여승으로 불린 ‘일엽 스님’이 됐다

 

미륵종 제5세 종정김은호 화백에게서 배우는 등 화승으로도 명성 일당 김태신 스님 ?어머니로 부르지 말고. 스님으로 불러라?라고 물리쳐 눈물만 흘리며 되돌아왔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자신을 양자로 삼아준 이당 김은호(1892-1979)화백에게서 그림을 배운 뒤 일 제국 미술학교를 나온 그는 화가로 활동하다 중년을 넘긴 뒤 건너와 국적을 얻었다, 66살 늦은 나이에 어머니의 일엽스님의 뒤를 따르겠다며 직지사 산문의 관응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불화나 인물화를 그리는 동양채색화 기법으로 화승 활동을 했다, 비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이다.

연합뉴스

 

 

 

 

 

 

원본 보러가기 아래클릭

 

수덕여관 6인의 순정, 사랑, 예술, 인생 이야기

 

'수덕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덕사의 여승, 스님 일엽...  (0) 2016.07.0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