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주부전(鼈主簿傳)》
《수궁가(水宮歌)》 (귀토설 [龜兎說])
--어린이 백과-- (천재학습백과 미리보는 중학 문학)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전(金庾信傳)>에 나오는 토끼와 거북의 이야기. 642년(신라 선덕여왕11) 김춘추(金春秋:태종무열왕)가 백제에 복수하려고 고구려에 청병(請兵)을 하러 갔다가 오히려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의 반환을 요구받고 억류를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구려 왕 의 총신(寵臣)인 선도해(先道解)에게 뇌물을 주고 술을 대접하였더니 취한 선도해가 귀토(龜兎)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춘추는 여기에서 암시를 얻어 고구려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라의 선덕대왕(선덕여왕) 11년 (임인) 백제가 대량주 大梁州 (대량주 大良州 라고도 하며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 , 여기서는 대야 성으로 대야성은 백제 지역에서 서라벌[신라 수도]로 가는 관문이었고 신라의 주요 요충지였습니다. 이를 격파했습니다. (백제 의자왕의 대야 성 함락)
그 때 춘추 공(이후 태종 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딸 고타소낭 娘 이 (=고타소 아가씨가)
(대야 성 성주였던) 남편 품석을 따라 죽었습니다, (그렇게 김춘추는 딸의 죽음에 잠시 정신이 나갔다가 얼마 후에,,) <분노한 김춘추>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춘추(김춘추)는 이를 한탄하며 고구려에 청병(군사를 요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수를 갚고자 했습니다. 왕(선덕여왕)이 이를 허락했습니다. (김춘추가 고구려로)길을 떠나기 전에 김춘추가 김유신에게 말했습니다. <김춘추>나와 공은 일심동체(한마음 한 몸)로서 (吾與公同體 오여 공동체) 나라의 기둥이오, 이번에 내가 만약 고구려에 들어가 불행한 일을 당한다면 공이 무심 (無心) 할 수 있겠소.? (내가 고구려가서 위기에 겪으면 공은 무심하게 가만히 있을 거이오? )
김유신이 대답했습니다. <김유신>공이 만일 돌아오지 못한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 , 백제 두 왕의 궁정(궁궐 안)을 짓밟을 것이오. 만약 이렇게 하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백성들을 대하겠소. 김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김유신)공과 함께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했습니다.
(피의 맹세로 비슷한 단어로 삽혈 歃血 [마실 삽, 피 혈] 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김춘추>내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오. 만일 이 기한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을 것이오. <김유신>만약 60일이 넘으면 그때는 제가 군대를 이끌고 북진할 것입니다 !! 그들은 드디어 작별했습니다. 그 뒤에 김유신은 압량주 押梁州 (오늘날 경상북도 경산시) 군주 軍主 (주 장관) 가 되었습니다
김춘추가 훈신(사람 이름) 사간(=사찬 , 신라 8등 벼슬) 과 함께 고구려에 사절(사신)로 가는 도중 대매 현 代買縣 에 도착했습니다. 그 때 (대매 현)고을 사람 두사지(사람 이름) 사간(=사찬 , 신라 8등 벼슬) 이 푸른 베 3백 보(1척 23cm , 1보 =6척이면 1보=138cm 니까 414m) 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두사지>현재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반정을 일으키고 상당히 불안한 시기이옵니다. 혹시 긴히 쓰일 일이 있을 것이니 이 푸른색 베를 챙겨 가십시오. <김춘추>고맙소. ! (김춘추 일행이) 고구려 경내(국경 안)에 들어가니 고구려왕(고구려 마지막 왕이자 28대왕 보장왕 고보장) 이 태대대로(혹은 대막지리, 연개소문을 위한 특별 관직) 개금(연개소문) 을 보내서 객관(사신이 머무는 숙소)을 정해주고 또한 연회를 열어 우대해 주었습니다.
<연개소문>김춘추라 했던가.? (이자는 보통의 눈빛이 아니군,,) <김춘추>예 (생각보다 씩씩하고 뛰어나게 생겼군,, 이자가 사실상 고구려 왕 이라 지,,) 어떤 사람이 고구려 왕(보장왕)에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신라 사자(사신, 여기서는 김춘추)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이번에 그가 온 것은 아마도 우리의 형세를 정탐하려는 것 같으니 왕께서는 잘 처리하시어 후환이 없게 하소서 고구려 보장왕은 김춘추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해서 그(김춘추)를 곤혹스럽게 하고자 하여 그(김춘추)에게 물었습니다.
<보장왕>마목현 麻木峴 (조령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사이에 있는 고개) 과 죽령 竹嶺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에 사이에 있는 고개) 은 본래 우리나라(고구려) 땅이니 만약 이를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면 (김춘추 그대는 신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 김춘추가 대답했습니다. <김춘추>국가의 영토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신은 감히 명령을 따를 수 없습니다.
보장왕이 분노해서 그(김춘추)를 가두고 죽이려 하다가 미처 죽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보장왕>딱 보니까 보통 인물이 아닌데,,죽이자니 반발이 클 테고 그렇다고 살리면 고구려에 후환이 있을 거 같고 하므로 보류상태로 있는데 ,, 김춘추는 (두사지에게 받은) 푸른 베 3백 보를 보장왕의 총신 寵臣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 선도해 에게 몰래 주었습니다.
도해(선도해)가 음식을 준비해 와서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하자 농담으로 말했습니다. <선도해>그대도 일찍이 ?거북이와 토끼의 설화를? 들었을 것이오, 옛날 동해 용왕의 심장에 병이 났는데 의사가 <용궁 의사>토끼의 간을 얻어 약에 섞어 먹으면 병을 고칠 수 있다 고 하였소 그러나 바다에는 토끼가 없으니 어찌할 수 없었소. 그 때 마침 거북이 한 마리가 용왕에게 아뢰었다오. <거북이>제가 그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했습니다,
용궁의 용왕(龍王)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토끼의 간(肝)을 약으로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용왕은? 누가 육지로 가서 토끼의 간을 구하여 오겠느냐? 물으니 거북은?용왕에 충성심으로 그 일을 자청하여 육지로 나가 토끼를 꾀어 와서 용왕에게 바치니 용왕이 반가워하며 빨리 배를 베어 간을 꺼내어 네게 가져오라 한다.
이 사실을 알고 놀란 ?토끼는? 내가 속았구나! 토끼는 재빨리 꾀를 써서 말하기를 “원래 토끼는 간을 암토끼 에게 있는 것이지 수토끼 같은 나에게는 간이 없는 것입니다?그 대신 암토끼는 밑에 구멍이 세 개가 있습니다, 새끼주머니가 있고 간도 있고 한데 수토끼는 밑에 구멍이 두개 있는데 간도 없고 새끼주머니도 없지요. 의심이 나면 지금이라도 내 밑을 살펴보십시오, 진작 에 말을 했으면 내가 좋아하는 암토끼가 많이 있는데 소개를 해 줄 것을 이제라도 용왕님을 위하여 빨리 도로 가서 암토끼를 데리고 오겠노라”고 하였다,
이때 용왕이 주저하고 있다, 토끼는 용왕의 눈치를 살피며 내가 용왕님을 위하여 죽는 것은 영광이지만 내가 없이는 간이 있는 암토끼를 구할 수 없으니 이후에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이 말에 속아서 용왕은 거북에게 빨리 도로가서 간이 있는 암토끼를 구하여 오도록 명령한다, 거북은 토끼를 다시 등에 업고 육지까지 와서 내려놓자 토끼는 용왕과 거북의 어리석음을 욕하고 네놈과 용왕이 나에게 속았구나 하고 산 높은 곳으로 달아나
언덕에 앉았는데 별안간 독수리가 토끼를 낡아 채 하늘로 올라가니 어처구니없이 이번에는 하늘 공중에서 죽게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이대로 죽을 순 없다고 생각하고 꾀를 써서 독수리 아줌마. 나 하나를 먹는 것은 임시 배를 채움이나 내가 평생 먹을 병아리를 준비해놨으니 잠시 그곳으로 가서 받으시오 하니 욕심 많은 독수리가 다시 그곳으로 가서 내려놓으니 토끼는 나 살려라 하고 바위틈으로 들어가 정신을 차리고 과거를 뉘우친다.,
육지에서 내가 욕망을 채우지 못하고 바다 용궁으로!! 하늘 공중으로!! 가 봐도 믿을 곳은 못 되더라 오직 나를 먹고자하며 죽음뿐이더라, 바위틈 여기가 내가 평안히 살 곳이다,. 앞으로 모든 허영심을 버리고 바르게 살리라,!!
이는 그 후 《별주부전(鼈主簿傳)》 《수궁가(水宮歌)》 등의 소재가 되었다.
#,김춘추 별주부 토끼의 꾀를 쓰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우애가 신라 삼국 통일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평화롭고 살기 좋은 나라를 건설하자는 신념을 함께 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세력 다툼에 힘겨운 때였습니다.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당나라와의 통로인 당항 성을 잃었습니다.
백제의 장군 윤충 에게는 대야 성을 내어 주었습니다.
이때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 장군과 딸의 목숨을 잃었습니다.
김춘추는 김유신을 만나 두 달 안에 돌아오겠다는 약조를 남기고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백제를 멸망시키려는 야욕으로 연개소문을 만나러 갔습니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없애고 보장왕을 세운 후 나라의 모든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연개소문이 김춘추에게 죽령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무찌르겠다고 하자 김춘추는 '국가의 영토는 신하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은 들은 고구려의 대신들은 모두 그 말에 감탄하였습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가두었습니다.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궁리하던 중 김춘추에게 청포 300보를 선물 받은 고구려 총신인 선도해가 별주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토끼처럼 육지에 두고 온 간을 가져오겠다는 식의 약속을 하고 도망가라는 뜻이었습니다. 김춘추는 즉시 보장왕에게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고구려 땅이니 내가 신라로 돌아가 왕에게 청하여 돌려보내도록 하겠다는 글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풀려난 김춘추는 돌아오는 길에 용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향해 달려오는 김유신을 만나게 됩니다. 약속한 두 달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김춘추를 구하러 오는 길이었습니다.
<토끼전>
요약 우리 마음속에 용왕과 같은 이기심이나 별주부와 같은 헛된 공명심, 그리고 토끼와 같은 허영심은 없는지 경각심을 주고 있다,.
목차
1. 1. 작품 소개
1. 1) 핵심 정리
1. 2) 등장 인물
1. 3) 줄거리
1. 2. 감상 나누기
1. 1) 토끼에게 속은 것을 알고 자라가 자살하는 결말
1. 잠깐 퀴즈
1. 작품 소개
동물을 인간과 같이 표현한 우화 소설로, 동물들을 통해 조선 시대의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풍자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구전되는 과정 중에 다양한 결말의 작품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교훈과 각각의 등장인물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이 소설을 읽어 보자.
1) 핵심 정리
· 갈래 : 고전 소설, 판소리계 소설·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배경 : 시간 - 옛날, 공간 - 용궁, 산속· 주제 : 헛된 욕심을 부리지 말자.· 특징 : 동물의 특징을 잘 살려 의인화하고 있음.
2) 등장 인물
· 별주부 자라 : 용왕의 신하로, 충성심이 깊어요. 용왕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뭍 으로 토끼를 잡으러 가요.· 토끼 : 욕심도 많고 꾀도 많아요. 자라의 꼬임에 넘어가 용궁으로 들어오지만 꾀 를 부려 위기에서 벗어나요.· 용왕 : 바닷속 임금이에요.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을 가리지 않아 요.· 자가사리 : 토끼의 꾀에 넘어가는 용왕에게 바른 말을 하지만 오히려 벌을 받아 요.
‘토끼전’은 판소리계 소설이라 작가를 알 수 없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던 설화 ‘구토지설’을 바탕으로 해서 판소리 ‘수궁가’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소설로 정착한 것이 ‘토끼전’이랍니다.판소리계 소설은 구전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에 의해 개작되면서 내용이 많이 달라져서 다양한 이본(異本)1)이 존재한답니다. 판소리는 당시 서민들이 품고 있던 사회적 불만을 간접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판소리계 소설에는 서민들의 눈에 비친 지배층의 부패한 모습이 잘 드러나 있기도 하답니다.
자라 하릴없어 탄식 왈, “간특한 토끼에게 속고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 용왕을 보리오.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하고 글을 지어 바위 위에 붙이고 머리를 바위에 땅땅 부딪쳐 죽었더라. 이때 용왕이 자라를 보낸 후 소식 없음을 괴이 여겨 자라의 형 대사성 거북을 시켜 그 까닭을 알아 오라 했다.거북이 즉시 물가에 이르러 살펴보니, 바위 위에 글을 지어 붙이고 그 곁에 자라의 시체가 있었다.거북이 불쌍히 여겨 통곡하고 자라의 시체와 글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와 아뢰니, 용왕도 불쌍히 여겨 예물을 내려 후하게 장사 지내 주었다. ─ 경판본2) ‘토생전’
2) 자라가 토끼를 놓치고 수궁 행을 포기한 결말
토끼가 도망간 후 자라는 기가 막혀 통곡하고 나서, 간도 얻지 못하고 무슨 면목으로 수궁에 돌아가 용왕을 뵙느냐며 수궁 행을 포기한다.그 길로 소상 강에 돌아가서 대 수풀에 의지하여 망명하여 사는 고로 그 자손 세상에 두루 퍼지고, 자라 부인 암자라는 토 선생과 이별 후에 상사병이 되어 몇 개월 신음하다 속절없이 죽었으니, 수궁에서는 그 자세한 내용을 모르고서 별주부를 생각하여 그러하다 하고 용왕에게 글을 올려 열녀문을 내렸고, 용왕도 토끼를 기다리다 병이 점점 더하여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으로 피하였다가 별세하고 세자 즉위하여 수궁이 태평해진다. ─ 가람본3) ‘별토가’
3) 용왕이 토끼의 똥을 먹고 병을 치료한 결말
이때 용왕이 토끼의 똥을 먹고 병이 나아 자라는 충신이 되었다. 토끼는 신선을 따라 달로 올라가서 이때까지 약 방아를 찧고 있다. 자라와 토끼란 다 미물인데 장한 충성과 많은 꾀는 사람하고 같은 까닭에 타령을 만들어서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사람으로 태어나서 토끼와 자라만 못하면 그 아니 부끄러운가, 부디부디 조심하오. ─ 완판본4) ‘퇴별가’
<잠깐 퀴즈>
글을 읽고 아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 이 소설은 ( ㅍ ㅅ ㄹ )계 소설이다.2. 용왕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토끼를 찾아 나선 인물은 OOO이다.3. 토끼는 장가를 보내 주겠다는 꼬임에 빠져 수궁에 따라간다. (O, X)4. 용왕의 병에 좋은 약은 토끼의 O이다.5. 수궁에서 살아 돌아온 토끼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위기를 모면하는 ( ㅈ ㅎ )'와 '헛된 ( ㅇ ㅅ )에 대한 경계' 등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토끼전 (천재학습백과 미리보는 중학 문학)
#,자라가 말하기를
"내 성은 별(鼈)이요, 호는 주부(主簿)로다?. 등이 넓기는 물에 다녀도 가라않지 아니함이요, 발이 짧은 것은 육지에 다녀도 넘어지지 아니함이요, 목이 긴 것은 먼 데를 살펴봄이요, 몸이 둥근 것은 행세를 둥글게 함이라. 그러하므로 수중에 영웅이요, 수족(水族)에 어른이라. ?세상에 문무겸전(文武兼全)하기는 나, 뿐인가 하노라."#,토(兎)끼 가로되,"내가 세상에 나서 만고풍상(萬古風霜)을 다 겪다시피 하였으되 그대 같은 호걸은 이제 처음 보는 도다."#,자라 가로되,"그대 연세가 얼마나 되 관대 그다지 경력이 많다 하느뇨?"#.토끼 가로되,"내 연기(年紀)를 알 양이면 육갑을 몇 번이나 지내였는지 모를 터이오. 소년 시절에 월궁에 가 계수나무 밑에서 약방아 찧다가 유궁후예(有窮后예)의 부인이 불로초(不老草)를 얻으러 왔기로 내가 얻어 주었으니 이로 보면 삼천갑자 동방삭(東方朔)은 내게 시생(侍生)이오, 팽조(彭祖)의 많은 나이 내게 대하면 구상유취(口尙乳臭)오 종과 상전이라. 이러한즉 내가 그대에게 몇 십 갑절 할아비 치는 존장(尊長)이 아니신가."
《토끼전》《토생원전(兎生員傳)》《토(兎)의 간(肝)》이라고도 한다. 한문본인 《토별산수록(兎鼈山水錄)》《별토전(鼈兎傳)》 등 여러 이본(異本)이 있다. 다른 판소리 계통의 소설인 《춘향전(春香傳)》《심청전(沈淸傳)》 등과 같이 영 ·정조 시대에 형성된 작품으로, 판소리 《수궁가(水宮歌)》를 소설화한 것이다. 옛날부터 전하는 고구려의 설화(說話)인 《귀토지설(龜兎之說)》에 재미있고 우스운 익살을 가미한 내용으로 한글이 생기자 정착된 의인소설(擬人小說)이다. 이본에 따라서 내용이 약간씩 다르기는 하나, 우화적(寓話的)이고, 고사(故事)를 인용해가며 미사여구(美辭麗句)로 표현하여 전편에 희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점에서 공통적이다. 비슷한 이야기는 불전(佛典)인 《자타카 본생경(本生經)》에도 있고, 자라와 원숭이를 소재로 한 비슷한 설화가 《별미후경(鼈經)》에 있으며, 일본에는 《수모원(水母猿)》이 있다.이와 같은 인도나 한국 및 일본의 민담(民譚)들은 한 기원에서 각 민족에 전파된 것으로 보이며, 《귀토지설》이 한국에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김유신전(金庾信傳)>에 김춘추(金春秋)가 고구려에 잡혔을 때에 이 고지(故智)를 이용하였다는 설화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남해(南海)의 용왕(龍王)인 광리왕(廣理王)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영약(靈藥)인 토끼의 간(肝)을 구하는 사명을 띤 자라가 산중에서 토끼를 꾀어 등에 업고 수궁(水宮)으로 돌아오던 중 내막을 알게 된 토끼가 기지로써 간을 볕에 말리려고 꺼내 놓고 왔노라 는 말에 속아 토끼를 놓쳐 버린다. 이에 자라가 자살하려던 찰나, 도인(道人)의 도움으로 선약(仙藥)을 얻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로서, 자라와 토끼의 행동을 통하여 인간성의 결여를 풍자해 주는 내용이다.
#. 김춘추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백제를 제압하기 위해 외교에 골몰했던 그는 과연)
김유신은 자신의 집으로 김춘추를 자주 불러 축 공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김유신의 집에 드나들던 김춘추는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 와 눈이 맞았고 급기야 문희 는 혼전임신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안 김유신은 부도덕한 여동생을 불에 태워죽이겠다며 마당에 불을 피웠다. 때마침 남산에 오른 선덕여왕이 연기를 보고 그 사연을 물었다.
"그 누이가 남편도 없이 몰래 임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김춘추가 크게 당황했다. 선덕여왕은 김춘추에게 문희 와의 결혼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김춘추의 사람 됨됨이를 알아본 김유신의 계책이었다.
#.김유신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경남 산청 금서면 <구형왕릉>.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 그는 법흥왕 때 금관가야를 법흥왕에게 바치고 귀순했다. 이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왕이 김유신의 증조부다.
신라로 귀순한 김유신 가문은 숱한 전공을 세운다. 김유신의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은
진흥왕과 더불어 신라의 정복 사업에 큰 공을 세웠지만, 아버지 김서현은 충북 진천, 신라
의 최 변방으로 좌천되었다. 신라 주류 사회는 정통 진골 귀족이었다,
김유신 가문은 신라사회에서 여전히 비주류였다. 김춘추 역시 신분적 한계가 있었다.
진흥왕의 둘째 아들 진지왕은 유부여 도화랑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 비형이란 아들을 낳았다. 진지왕은 즉위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국인, 즉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서 좇 겨 난다. 그가 김춘추의 할아버지다.
#.김춘추는 폐위된 왕의 후손이었던 것이다. "폐위된 진지왕의 혈통,
김춘추 같은 경우 성골에 해당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골이 아닌 진골 출신으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김춘추는 왕위계승에서 멀어져 있던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강종훈 교수(대구카톨릭대 역사교육학과)
출처: https://labongbong.tistory.com/1114 [라봉봉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힘이 점점 기울어 가던 무렵 연태조의 아들로 태어났다.연개소문의 집안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모두 고구려 최고 벼슬인 막리지를 지낸 명문가였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활달하고 큰 뜻을 품었던 연개소문은 15세 때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부대인 대대로가 되었다. 그리고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642년(영류왕 25)만주의 부여성에서부터 발해만(동해)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천리장성을 쌓으면서 연개소문은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세력이 점점 더 커졌다. 이에 연개소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영류왕과 귀족들은 그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이것을 눈치 챈 연개소문은 자신을 반대하는 귀족과 신하들을 모두 연회에 초청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한 180여 명을 모두 죽인 뒤 평양성 궁궐로 들어가(고구려27대왕 영류왕)마저 죽였다.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 장 을 허수아비 왕으로 뒤를 이어 (보장왕)을 세운 뒤 자신이 인사권이나 군권을 장악하고 최고 벼슬인 대막리지가 되어 권력을 손에 쥐었다.그 당시 남쪽에서는 신라와 백제간의 싸움이 계속되었고, 또 한강 유역을 둘러싼 삼국간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때 신라는 백제에게 40여 성을 빼앗기고 대야성마저 빼앗기자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가두고 오히려 신라에게 빼앗겼던 마목현(조령)과 죽령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신라 국경에 있는 성을 빼앗은 한편 백제와 힘을 합쳐 신라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마저 빼았았다.연개소문은 643년 당나라에서 도교의 도사 8명과 <도덕경>을 들여왔다. 새로운 사상으로 민심을 모으고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원활히 해 전쟁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그러나 연개소문은 당나라 태종이 사신을 보내 신라와 화해하라고 요구하자 이를 물리치고, 사신을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자 645년(보장왕4) 당나라 태종이 17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쳐들어왔다. 연개소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등이 차례로 당나라에 함락되고 말았다. 그때 안시성 싸움에서 양만춘 장군이 60여 일간의 치역 한 싸움 끝에 당나라 군사를 크게 물리침으로써 고구려는 전쟁에서 승리했다.그 뒤에도 네 차례에 걸쳐 당나라가 쳐들어왔으나, 그때마다 모두 물리쳐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기상을 크게 떨쳤다.그러나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고구려는 금세 힘을 잃었다. 더욱이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대막리지에 오른 맏아들 연남생이 형제들과의 다툼에서 밀려나 당나라로 망명했고, 동생인 연정토도 신라에 귀순해 버렸다.그리하여 고구려는 668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출처 : 까치놀터
글쓴이 : 까만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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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곳에서 인용했기 때문이 내용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2020년 10월01일(추석) 몽은.